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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

신라는 다문화 국가였다? 외국인 귀화인이 이끈 신라의 숨은 동력

신라는 다문화 국가였다? 외국인 귀화인이 이끈 신라의 숨은 동력

신라는 다문화 국가였다? 외국인 귀화인이 이끈 신라의 숨은 동력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신라의 이미지는 ‘금관의 나라’, ‘불교 문화의 꽃을 피운 나라’, ‘삼국을 통일한 강력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신라가 다문화 국가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신라의 국가 발전에 기여한 귀화인들의 실체와 그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중심으로 신라의 국제적 성격을 조명해 봅니다.

 

신라의 다문화


귀화인은 누구인가? 신라에 들어온 다양한 인물들

신라에 귀화한 외국인들은 단순한 망명객이나 피난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인, 기술자, 장인, 상인, 승려 등 각 분야의 전문가로, 신라의 국력 강화와 문화 융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고구려, 백제, 가야, 당나라, 왜(일본), 유목 민족 출신까지 그 출신지는 매우 다양했습니다. 신라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이주민들은 신라 사회에 깊이 스며들어 왕족과 혼인하거나 고위 관직에 오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귀화인: 설계두, 강수, 김춘추의 외손들

● 설계두 (薛稽頭): 고구려 출신의 외교가

설계두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로 망명한 인물로, 신라 외교의 중추를 맡았습니다. 당나라와의 관계 조율, 고구려 유민 정책 등에 깊이 관여하며 신라의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 강수 (强首): 백제계 유학자이자 문장가

강수는 당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학자로, 신라의 외교문서 체계 정비와 유교 도입의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신문왕에게 ‘왕도 정치’를 강조한 상소문을 바친 인물로, 유교적 정치 철학의 정착에 기여했습니다.

● 김유신 가문: 귀화한 가야계 출신

삼국통일의 핵심 인물인 김유신은 가야 왕족의 후예로, 신라에 귀화하여 화랑도를 통해 성장했습니다. 김유신 가문의 활약은 가야계 귀화인이 어떻게 신라 지배층으로 편입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입니다.


신라의 다문화 수용 전략: “피를 받아들이고 문화를 융합하라”

신라는 폐쇄적인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외부 인재를 받아들이고, 혼인과 관직 기용을 통해 통합을 유도하는 유연한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가 혼맥 전략입니다. 신라 왕실은 고구려·백제·가야계 유력 귀화 가문과 적극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으며, 내부 안정과 민심 통합을 동시에 도모했습니다.
예: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의 외가는 고구려계, 사위는 백제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당나라에서 귀화한 중국계 장인들은 금속 세공, 도자기, 건축기술 등에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신라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


불교 확산과 함께 들어온 외국인 승려

신라의 불교문화 확산에도 귀화인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특히 중국, 중앙아시아, 인도 등에서 활동하던 승려들이 신라에 유입되어 불경 번역, 사찰 건립, 불화 제작 등 다양한 영역에 기여했습니다.

예를 들어, **혜통(惠通)**은 중앙아시아 계통으로 알려진 승려로, 선덕여왕 시기 불교 교리 보급과 국사(國師)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사천왕사, 분황사, 황룡사와 같은 대사찰 건축 과정에는 당나라 기술자와 장인의 손길이 더해졌다는 고고학적 정황도 존재합니다.


고분과 유물로 확인되는 다문화의 흔적

경주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분과 유물들에는 이질적인 양식이 혼합된 사례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 조각에 서역풍 얼굴이 등장하거나, 무덤 구조가 중국 북조 양식을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신라가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폐쇄 국가가 아니라, 외래 문화를 유연하게 수용한 개방형 문명국이었음을 시사합니다.

특히 5~7세기 경주 지역의 귀족 무덤에서는 중국식 금속 세공 기술, 중앙아시아 풍 의복, 페르시아 유리잔까지 발견된 바 있어, 신라가 동서 교류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신라의 다문화 역량

현대 사회는 글로벌 이민, 문화 융합, 다양성 존중이 화두입니다.
신라가 1,300여 년 전 이미 귀화인과 외래 문화를 전략적으로 수용하여 국가를 성장시킨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 다문화 수용은 불안이 아닌 기회입니다.
  • 다양성은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은 오히려 더 강한 정체성을 만들어냅니다.

신라는 바로 그 실천적 모델이었습니다.


마무리하며

신라는 단일한 민족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문화적 개방성과 다양성 수용을 바탕으로 성장한 국제적 다문화 국가였습니다.
외부 인재와 기술을 배척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조화시켰던 그 유연함은 신라가 1,000년 왕조로 존속한 힘의 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