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수라상에 '커피'가? – 서양 문물의 유입과 왕실 식문화의 변화
‘조선 시대 왕이 마신 것은 사약 아니면 유자차’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조선 왕실의 식문화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이미지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서양의 문물과 식재료가 조선 왕실에도 스며들며, 수라상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놀랍게도 ‘커피’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과연 커피가 조선의 수라상에 올랐을까요? 그 실체를 문헌과 역사 기록을 통해 조명해 보겠습니다.
📌 서양 문물의 유입 – 조선의 '문을 두드린' 세계
조선 후기부터 조선은 점차 쇄국의 장벽이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강화도 조약(1876)을 거치며, 조선은 일본과 서양 국가들과 강제적으로 외교를 시작했고, 동시에 통상, 의료, 종교, 식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외래 문물이 유입되었습니다.
대표적 예시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서양 의학: 연합뉴스에 따르면 1880년대 고종은 미국인 의료 선교사 알렌을 통해 서양식 진료를 받았고,
- 서양 과자: 1880년대 이후, 일본을 통해 버터·과자류가 왕실 내 들어오기 시작
- 음료 문화: 이 시기 문헌에서 ‘가배(珈琲)’ 혹은 ‘**양탕국(洋湯國)’이라는 표현 등장
📌 ‘가배(珈琲)’라는 단어의 등장
가장 흥미로운 것은, 1895년 《대한매일신보》, 《한성순보》 등의 신문이나 왕실 기록에서 ‘가배’라는 표현이 커피를 의미하며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1896)’ 이후 서양식 일상 문화에 깊이 노출되면서, 고종이 커피를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승정원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아침에 가배 한 잔을 드시며 러시아 인사와 담소를 나누시다."
즉, 19세기 말 조선의 왕실 수라상에 커피가 실제로 등장한 것입니다. 다만 이는 백성들의 식생활이 아닌 왕실과 외교 사절, 상류층 중심의 문화적 수용이었다는 점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 단순 음료를 넘은 ‘문화’로서의 커피
고종은 특히 **정관헌(靜觀軒)**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정관헌은 덕수궁 내 서양식 건물로, 유리창과 의자, 테이블 등이 구비되어 있던 장소입니다. 이 공간은 말하자면 조선 왕실의 **‘서양식 살롱’**이자, 고종의 개인적 쉼터였고, 커피는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 커피잔은 청화백자나 일본제 자기로 제공됨
- 커피는 일본에서 가공된 형태로 수입
- 고종은 비밀 회담 시에도 커피를 이용
이는 단순한 미식이 아닌, 권위와 문화적 감각을 동시에 드러내는 상징이었습니다.
📌 조선 왕실 식문화의 변화
이후 대한제국기에는 수라상에도 서양식 디저트, 케이크류, 과일 보존식(잼), 양갱, 커피가 종종 제공되었고, 이는 근대 황실의 정체성과도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왕실 외에도 상류층 양반가나 개화파 지식인 집안에서도 커피와 관련된 물품이 언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양반의 기록에서는 “가배가 쓰고 향기롭다”는 감상도 등장합니다.
✅ 결론
조선 시대 수라상에 커피가 올랐다는 사실은 단순한 음식 문화의 확장을 넘어, 역사적으로 왕실이 외부 문물을 어떻게 수용하고 재해석했는가에 대한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특히 고종은 커피를 외교, 의례, 일상의 경계선에서 정치적 도구이자 문화적 정체성의 표현으로 활용한 인물이었습니다.
커피 한 잔은 곧 근대 조선이 세계와 처음으로 마주한 풍경이었습니다. 조선의 끝자락, 대한제국의 시작에 조용히 놓여 있던 커피 한 잔은 오늘날 우리의 시선에서 볼 때도 가장 흥미로운 역사적 디테일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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