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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

발해, 고구려를 넘어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외교 유산

발해, 고구려를 넘어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외교 유산
발해, 고구려를 넘어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외교 유산

발해, 고구려를 넘어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외교 유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발해가 고구려의 정신과 문화를 계승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발해는 단순히 고구려의 후예를 넘어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독자적인 외교력을 발휘하며 강대국으로 우뚝 섰던 '해동성국(海東盛國)'이었습니다. 당나라, 일본, 흑수말갈 등 주변국들과 활발한 외교 관계를 맺으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이끌었던 발해의 외교 유산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1. 고구려 계승을 넘어선 독자적인 정체성 확립: 발해의 건국과 초기 외교

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연합하여 건국한 나라입니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발해를 세움으로써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국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 실리적인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1) 당나라와의 관계: 견제와 실리의 줄다리기

건국 초기 발해는 당나라의 견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발해는 당나라와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면서도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견지했습니다. 무왕(대무예) 시기에는 당나라의 산둥반도를 공격하며 강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문왕(대흠무) 시기에는 당나라와 사신을 교환하고 문물을 수용하는 등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는 발해가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단순한 대립보다는 '견제와 실리'를 추구하는 유연한 외교 전략을 구사했음을 보여줍니다.

2) 일본과의 관계: 견당사(遣唐使)를 능가하는 '견발해사(遣渤海使)'

발해는 당나라와의 견제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727년 발해 무왕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이래, 발해와 일본은 200여 년간 30여 차례 이상 사신을 교환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당나라와의 교류를 위해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했지만, 발해와의 교류는 그에 못지않게 활발했습니다. 특히 발해는 일본에 발달한 문물과 기술을 전파하는 등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는 발해가 동북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일본이 발해를 독립적인 강대국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3) 흑수말갈과의 관계: 주변 민족 포용 정책

발해는 주변의 여러 말갈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통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흑수말갈은 발해 건국 초기부터 대립하기도 했지만, 발해는 무력으로 제압하는 동시에 회유와 포용 정책을 통해 점차적으로 흑수말갈을 발해의 통치 아래 두었습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무력 통치가 아닌, 다양한 민족을 아우르는 '다민족 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포용 정책은 발해가 안정적인 국가 운영과 대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2.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외교 전성기: 문왕 시기의 다자 외교

발해는 문왕 시기에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문왕은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통해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1) 5경(五京) 체제와 국제 교역의 중심지 발해

문왕은 상경용천부를 비롯한 5경 체제를 구축하여 지방 통치와 함께 국제 교역을 활성화시켰습니다.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는 당나라의 장안성을 모방하여 건설되었으며, 국제적인 무역 중심지로 번성했습니다. 발해는 당나라와 일본뿐만 아니라 거란, 신라 등 주변국들과도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군사 강국을 넘어 경제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2) 발해의 문화 전파: 동북아시아 문화 교류의 허브

발해는 뛰어난 문화 수준을 자랑했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고구려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발해의 문화는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발해에서 파견된 사신들은 일본에 불경, 불상, 예술품 등을 전파했습니다. 또한 발해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배우고 돌아오게 함으로써 국제적인 지식 교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발해는 동북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요한 허브 역할을 수행하며 지역 문화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3. 발해 멸망 이후의 유산과 현대적 의미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했지만, 발해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1) 고구려-발해의 역사적 연속성 인식

발해의 멸망은 고구려의 역사적 흐름이 한반도를 넘어 만주 지역까지 이어졌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강조하는 것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역사적 연관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이는 고구려-발해의 역사가 단순히 한민족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고,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2) 다민족 국가로서의 발해: 현대 사회의 다양성 존중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연합하여 건국된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발해가 다양한 민족들을 성공적으로 통합하고 통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포용'에 있었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발해의 사례는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함께 발전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3)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의 발해: 평화와 협력의 모델

발해는 당나라, 일본, 흑수말갈 등 다양한 주변국들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200년 이상 존속했습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무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외교와 협력을 통해 안정적인 국제 질서를 유지하려 노력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동북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노력에 있어 발해의 외교적 유산은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발해가 보여준 다자 외교와 실리 추구는 현대 국제 관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발해, 잊혀진 강대국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

발해는 단순히 고구려의 후예를 넘어,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독자적인 위상을 확립하고 강력한 외교력을 발휘했던 '해동성국'이었습니다. 당나라와의 견제 속에서도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주변 말갈족을 포용하며 안정적인 국가를 운영했던 발해의 지혜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발해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가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며, 동시에 동북아시아 역사의 핵심적인 한 축을 담당했음을 일깨워줍니다. 발해의 유산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급변하는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 평화와 번영을 모색해야 하는 현대 한국에게 귀중한 지혜를 선사하는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발해의 외교적 유산을 깊이 연구하고 계승하는 것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