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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

전남 완도 ‘청해진’ – 장보고 이후에도 살아 숨 쉰 국제 무역항

전남 완도 ‘청해진’ – 장보고 이후에도 살아 숨 쉰 국제 무역항

오늘날의 전라남도 완도는 푸른 바다와 섬이 어우러진 남해안의 보석 같은 지역입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청해진(靑海鎭)**은 단순한 유적지를 넘어, 동아시아 국제 해상무역의 중심지이자 신라인의 자부심이 담긴 역사 공간입니다.

특히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9세기 장보고(張保皐) 장군이 해상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장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장보고의 삶과 활동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사실 장보고 사후에도 청해진은 한동안 국제적 항구 기능을 지속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뒷이야기를 되짚어보려 합니다.

 

전남 완도 ‘청해진’ – 장보고 이후에도 살아 숨 쉰 국제 무역항


📌 장보고의 청해진, 해상 네트워크의 시작

828년, 장보고는 신라의 허가를 받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합니다. 그는 이곳을 중심으로 신라, 당나라,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삼각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였고, 상단(商團)을 조직하여 인적·물적 교류를 폭발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그가 구축한 청해진은 단순한 군사 기지가 아닌, 다음과 같은 복합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 무역 중심지: 중국 비단, 일본 황금, 아라비아 향료 등 교역
  • 해적 방어 기지: 해상 치안 유지
  • 외교 거점: 신라 국력의 과시

📌 장보고 사후, 청해진은 사라졌는가?

장보고는 846년 귀족 세력과의 정치 갈등 끝에 암살당합니다. 이후 왕실은 청해진의 군사적 독립성을 견제하며, 청해진을 공식적으로 해체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청해진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 세 가지 측면에서 기능은 유지되었습니다:

  1. 상업 네트워크 유지: 장보고가 남긴 무역망은 상단, 승려, 사찰, 사적 상인 등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계속 유지됨.
  2. 지리적 이점: 완도 일대는 해상 물류의 요충지로, 후삼국 시대까지도 무역선이 드나드는 항구 기능 유지.
  3. 사찰 중심 교역: 장보고와 관련 깊은 법화사 등의 사찰이 교역과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 작용.

즉, 비록 공식 행정기구로서의 청해진은 해체되었지만, 상업적 기반은 ‘청해진 유산’으로서 살아남아 지역 공동체와 무역 상인들의 활동을 지탱했습니다.


📌 고려·조선 시대에도 이어진 완도의 교역 기능

  • 고려 초: 후백제와의 전쟁 시기, 남해안의 전략 거점으로 완도가 활용됨.
  • 조선 초기: 삼남지방과 제주도, 일본 간의 연안 교역과 어업 기지 역할 수행.
  • 조선 후기: 수산물과 소금 거래의 중심지로 발전.

이는 청해진의 역사적 유산이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인 해양 경제권의 중심지로 기능했음을 보여줍니다. 장보고의 흔적은 단지 비석이나 전설이 아닌, 지역 해양문명의 흐름으로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 오늘날의 청해진 유적과 완도의 의미

현재의 청해진 유적지는 장보고의 본거지였던 당산봉 일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유적지에는 청해진성 터, 선소(船所), 항만 구조, 군사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인근에는 장보고기념관, 장보고축제, 청해진 해양문화재단 등이 장보고 이후의 유산을 전승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완도는 여전히 수산업, 해양관광, 도서 물류의 중심으로서 청해진의 해양 DNA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결론

청해진은 단지 장보고 개인의 무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후에도 무너진 것이 아니라, 방식과 주체를 달리하며 이어진 해상 네트워크의 산물이었습니다. 장보고가 쌓은 유산은 곧 완도와 청해진을 ‘끊기지 않은 해양 문명’으로 만든 결정적 토대였습니다.

그 유산은 오늘날 우리에게 자주적 해양 외교의 지혜, 민간 무역의 가능성, 지역 경제의 뿌리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