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도성 밖 '성저십리': 조선 서민들의 삶이 숨 쉬던 공간
조선 시대 수도 한양은 '도성(都城)'이라 불리는 성곽 안에 정치, 권력, 문화의 중심지가 집중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의 일상이 모두 도성 안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성 바깥, 즉 성 밖 10리(약 4km) 이내 지역인 '성저십리(城底十里)'는 조선 백성들의 삶이 역동적으로 펼쳐진 또 하나의 한양이었습니다.
성저십리란 무엇인가?
'성저십리'는 말 그대로 도성 아래(성저), 10리 거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한 거리 개념을 넘어서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공간적·사회적 계층 구획의 경계였습니다. 도성 안이 왕실, 양반, 중인들의 거주지였다면, 성저십리는 상인, 수공업자, 천민, 농민이 집중된 도시 외곽 생활권이었습니다.
성저십리는 오늘날로 치면 '서울 변두리'가 아니라, 생활 중심이자 실질적인 민생 경제의 기반지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성저십리에 살았나?
조선 후기의 기록에 따르면 성저십리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주로 거주했습니다.
- 상민(常民): 생계를 위해 장사하거나 노동에 종사하는 자유민
- 천민(賤民): 백정, 기생, 무당, 재인 등 신분적으로 차별받은 계층
- 노비(奴婢): 관청이나 양반가에 소속된 종
- 도망자, 외지인: 신분제의 사각지대에 있는 유민(流民)
그들은 한양의 경제를 실질적으로 떠받친 주체였으며, 특히 남대문 밖 숭례문 일대, 동대문 바깥 청량리, 서대문 바깥 무악재, 북악산 자락 등지에 밀집해 살았습니다.
성저십리의 삶: 생계와 공동체
이 지역은 전통 장터, 수공업 골목, 민속 신앙 공간 등으로 기능하며, 도성 안보다 훨씬 자유롭고 다층적인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 남대문 밖: 남대문시장과 인접한 상업 활동의 중심지
- 동대문 밖: 제기동 일대는 약초, 식자재 유통지
- 서대문 밖: 장승과 솟대가 세워졌던 무속과 민속의 공간
- 북악산 아래: 장승배기, 무당촌 등 종교·주술적 기능 집중
또한, 성저십리 주민들은 마을 단위로 공동체 조직을 형성했고, 자체적으로 제사, 공동 노동, 자녀 교육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자생력을 키워갔습니다.
조선 정부의 성저십리 통제 방식
성저십리는 왕권과 관료 중심의 도성 구조에서 '경계 밖' 공간이었지만, 정부는 이를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 금지령: 도성 밖의 장터 운영은 제한되었지만, 실제로는 묵인되었습니다.
- 야간 통행 단속: 해가 지면 도성 출입을 막아 상권 분리를 시도했습니다.
- 신분 감시: 외지인, 도망자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성저십리는 도시를 유지하는 노동과 물류의 기반지대였기에, 통제보다 공존과 타협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오늘날의 성저십리, 그 흔적은?
현대 서울에서 '성저십리'라는 행정 구역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지명과 유적, 삶의 방식 속에 남아 있습니다.
- 숭례문 인근의 남대문시장: 조선 시대 상업 거점의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 제기동·청량리: 한약 시장, 전통 시장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창신동, 후암동, 신설동: 예전 성저십리 마을이 형성됐던 지역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도성의 경계 밖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이며, 현대 도시 서울의 뿌리를 이루는 공간입니다.
결론
'성저십리'는 조선 시대의 사회 구조와 공간 구조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권력과 중심이 집중된 도성 안과 달리, 생활과 생존이 맞부딪히며 민중의 삶이 피어난 도성 밖은 도시의 또 다른 심장이었습니다.
오늘날 도시 경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비춰볼 때, 성저십리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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