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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

조선 건국 초기의 토지 제도: 과전법에서 녹봉제까지의 변화와 의미

 

 

조선 건국 초기의 토지 제도: 과전법에서 녹봉제까지의 변화와 의미

조선 건국은 단순히 왕조의 교체를 넘어, 새로운 정치 이념과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혁명적인 과정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고려 말의 혼란을 야기했던 토지 제도의 개혁이 있었습니다. 토지 제도는 국가의 경제적 기반이자 통치 체제의 근간이었기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은 부패한 고려의 토지 제도를 바로잡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 건국 초기의 핵심 개혁인 **과전법(科田法)**의 시행부터 이후의 변화 과정까지 심층적으로 살펴보며, 이 개혁이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해 보겠습니다.

조선 건국 초기의 토지 제도
조선 건국 초기의 토지 제도

 


고려 말, 무너진 토지 제도의 문제점

고려 말기는 토지 제도의 문란이 극심했던 시기입니다. **권문세족(權門世族)**과 사원(寺院)들은 불법적으로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며 '농장(農莊)'을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고 백성들을 수탈하여 사적인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의 세금 수입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몰락하여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도전,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은 고려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경제적 기반을 해체하는 토지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이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됩니다.


과전법(科田法)의 시행과 그 내용

조선 건국 직전인 1391년,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고려의 토지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과전법**을 시행했습니다. 이 법은 단순히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왕조의 지지 세력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고,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키려는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과전법의 목적과 핵심 원칙

과전법은 **'역직(役職)에 대한 대가로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수조권)를 지급하는 제도'**였습니다. 즉, 관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토지를 주는 것이었죠. 이 법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 수조권만 지급: 관리에게 토지 자체의 소유권을 준 것이 아니라, 그 토지에서 국가를 대신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收租權)**만을 주었습니다.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에 있었습니다.
  • 등급별 차등 지급: 관리의 품계에 따라 토지를 차등 지급했습니다. 이는 관료 체제를 공고히 하고 신진사대부 세력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 세습 원칙 제한: 토지는 원칙적으로 현직 관리에게만 지급되었고, 관리가 사망하거나 퇴직하면 국가에 반납해야 했습니다.

다만, 유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내에게는 **수신전(受信田)**을, 자식에게는 **휼양전(恤養田)**을 지급하여 제한적인 세습을 허용했습니다. 이는 법의 안정성을 높이고, 관리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토지 고갈의 문제: 직전법(職田法)으로의 변화

과전법은 초기 조선의 안정에 기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관리가 죽거나 퇴직해도 토지가 세습되면서 점차 국가가 신규 관리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는 **토지 고갈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조선 세조는 1466년,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시행했습니다.

직전법은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로, 과전법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퇴직자에게 지급되던 수신전과 휼양전 등의 세습 규정을 모두 폐지하고, 오직 현직에 있는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부여했습니다. 이는 토지 부족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직전법의 폐지와 녹봉제(祿俸制)의 시행

그러나 직전법은 새로운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퇴직하면 토지를 잃게 되자, 관리들은 재직 중에 최대한 많은 세금을 거두려고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했습니다. 이는 또 다른 형태의 농민 수탈로 이어졌고, 국가 재정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결국 성종 대에 이르러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470년, 직전법의 폐지가 단행되었습니다. 대신 관리들에게 국가가 직접 세금을 걷어 급여를 주는 **녹봉제**가 전면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로써 관리가 개인적으로 백성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수조권은 완전히 사라지고, 조선의 토지 제도는 **국가 중심의 중앙 집권적인 형태로 확립**되었습니다.


결론: 조선 토지 제도의 역사적 의미

조선 초기의 토지 제도는 과전법에서 시작해 직전법을 거쳐 녹봉제로 진화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건국 초기의 개혁 이념이 현실의 문제와 부딪히며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과전법은 고려의 폐단을 혁파하고 새로운 왕조의 기반을 다졌으며, 녹봉제의 정착은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고 관리들의 사적 수탈을 제도적으로 막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조선의 토지 제도는 건국의 이상과 현실적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며, 500년 왕조의 안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핵심적인 요소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