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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

흥선대원군 집권기: 격변의 시대, 왕권 강화와 쇄국 정책의 명과 암

 

흥선대원군 집권기: 격변의 시대, 왕권 강화와 쇄국 정책의 명과 암

19세기 중반, 조선은 안으로는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피폐해지고, 밖으로는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가 빗발치며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아들을 대신해 10년간(1863~1873) 섭정을 펼치며 조선을 통치했습니다. 그의 집권기는 무너진 왕권을 바로 세우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개혁과, 거세게 밀려오는 서양 문물에 맞서 나라의 문을 굳게 닫았던 쇄국정책이라는 극명한 두 가지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정책들은 조선 사회에 깊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오늘날까지도 복합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집권기
흥선대원군 집권기


집권 배경: 세도정치와 혼란의 시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의 조선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일부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관직은 돈으로 매매되었고,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군포, 전세, 환곡 등 세금 제도인 **삼정(三政)의 문란**은 가혹했습니다. 특히 환곡제도는 백성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농민 봉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젊은 시절 '궁도령'이라 불리며 파락호(破落戶) 행세를 하는 등 철저하게 자신을 낮춰 세도가들의 경계를 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그는 실질적인 통치권을 장악하며 조선의 개혁을 위한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통치 개혁: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

흥선대원군은 집권 후 무너진 왕권을 바로 세우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그의 개혁 정책은 조선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 세도정치 타파와 왕실 권위 회복

가장 먼저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안동 김씨 세력을 대거 숙청하고, 능력 중심의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이는 붕당과 세도정치로 인해 파탄 난 정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또한 왕실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1865년,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었던 **경복궁 중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원납전(자발적 기부금)을 징수하고 당백전(고액 화폐)을 발행하여 물가 폭등을 야기하는 등 무리한 추진은 민심 이반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2. 삼정의 문란 개혁과 민생 안정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 호포제(戶布制): 군포를 양반과 상민 모두에게 징수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양반의 특권을 없애고 세금 부담을 공평하게 분배했습니다.
  • 사창제(社倉制): 마을 단위로 곡식을 빌려주고 갚게 하는 제도로, 기존의 탐관오리가 백성을 수탈하던 환곡제를 대신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일시적으로나마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3. 서원 철폐: 붕당의 근원 제거

당시 전국에 난립했던 **서원**은 학문 연구와 선현 제사를 명분으로 세금을 내지 않고 토지를 소유하며 붕당 정치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47개소를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는 강력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는 유생들의 거센 반발을 샀지만, 서원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대외 정책: 쇄국과 척화의 길

국내 개혁에 성공을 거두던 흥선대원군에게 가장 큰 위협은 서양 세력이었습니다. 그는 천주교 확산과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쳤습니다.

1. 천주교 박해와 외세의 침략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과 천주교 신자가 늘어나자, 흥선대원군은 1866년 **병인박해**를 일으켜 수많은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했습니다. 이에 프랑스가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하여 벌어진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丙寅洋擾)**입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외규장각의 서적들을 약탈했지만, 조선군과 의병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결국 퇴각했습니다.

이후 1871년에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를 침략하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했습니다.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를 함락시켰지만,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의 결사 항전에 부딪혀 결국 실패하고 물러갔습니다. 이 두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척화(斥和)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습니다.

2. 척화비(斥和碑) 건립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백성들에게 쇄국의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西洋 오랑캐가 侵犯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강력한 반외세, 쇄국 정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평가와 한계

흥선대원군은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도정치의 폐해를 바로잡는 등 국내 개혁에서는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생 안정에 기여하려는 그의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무조건적인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던 점은 그의 가장 큰 한계로 지적됩니다. 서양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조선은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고, 이는 훗날 일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내부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지만, 외부의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다 결국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비운의 정치가로 역사에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