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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

해동성국, 발해 선왕의 시대: 동방의 번영을 이룬 위대한 왕조의 전성기

 

해동성국, 발해 선왕의 시대: 동방의 번영을 이룬 위대한 왕조의 전성기

고구려의 옛 영토에 세워져 멸망한 고구려의 기상을 이었던 발해. 그 역사는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발해는 9세기 초, 전성기를 맞아 국제 사회로부터 '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며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시대는 바로 발해의 제10대 군주인 **선왕(宣王)**의 재위 기간(818~830)이었습니다. 선왕은 강력한 왕권과 뛰어난 통치력으로 발해의 국력을 극대화하여 멸망 직전의 신라와, 쇠퇴기에 접어든 당나라 사이에서 독자적인 위상을 확립했습니다.

 

 

해동성국
해동성국


발해 선왕(宣王)의 즉위와 해동성국의 기반

선왕이 즉위할 당시 발해는 내홍을 겪으며 국력이 잠시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강력한 왕권 확립에 나섰습니다. 그는 불안정한 왕실을 안정시키고, 과거의 혼란을 정리하며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웠습니다. 이러한 내부적 안정을 통해 선왕은 대외적으로 힘을 쏟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는 곧 발해의 전성기를 여는 중요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해동성국을 이룬 세 가지 핵심 정책

선왕이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이룬 업적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그는 군사, 정치, 경제 전반에 걸친 개혁과 확장 정책으로 발해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이 위대한 성과는 다음 세 가지 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과감한 영토 확장과 군사력 강화

선왕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주변 부족들을 정벌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특히 말갈족 부족들을 완전히 복속시키며 발해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발해의 영토는 북쪽으로 흑룡강(아무르 강) 유역까지, 동쪽으로는 연해주와 일본해(동해)까지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서쪽으로는 요동 지역을 차지하는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처럼 넓은 영토는 발해가 단순한 지방 정권이 아닌,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한 위대한 국가임을 증명하는 상징이었습니다.

2. 안정된 통치 시스템 확립

확장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선왕은 행정 체제를 재정비했습니다. 그는 수도 상경을 중심으로 **5경 15부 62주**로 이루어진 지방 행정 체제를 확립하여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이되 독자적으로 변형한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통해 국가 시스템을 안정시켰습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당나라의 모방 국가가 아니라,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주체적인 국가였음을 보여줍니다.

3. 경제적 번영과 활발한 대외 교류

광활한 영토를 기반으로 발해는 농업과 목축업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또한, 주변국과의 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발해는 당나라와 육로를 통해 교류하는 **'발해길(渤海道)'**을 개척하고, 일본과는 사신을 파견하여 문물과 상업 교류를 활발히 이어갔습니다. 심지어 신라와도 교류를 시도하며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이러한 활발한 대외 교류는 발해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고, 국제 사회에서 '해동성국'이라는 위상을 얻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해동성국'의 의미와 발해의 위상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는 발해가 스스로를 칭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이었던 당나라가 발해의 위세와 번영을 인정하여 붙여준 것입니다. 이는 발해가 당시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당당한 독립국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선왕 시기의 발해는 고구려의 군사적 기상과 함께, 안정된 통치 체제, 번영하는 경제를 갖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선왕의 사후 발해는 다시 혼란을 겪으며 멸망의 길을 걷게 되지만, '해동성국'의 영광스러운 기억은 발해가 우리 역사 속에서 잊혀서는 안 될 위대한 왕조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고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던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