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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이방인이 조선인이 되다: 기록에 숨겨진 외국인 귀화 이야기 조선 시대, 이방인이 조선인이 되다: 기록에 숨겨진 외국인 귀화 이야기 조선 시대를 떠올리면 흔히 단일 민족 국가로서 외부와의 교류가 적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선 시대에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외국인들이 조선에 귀화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심지어 조선 사회에 중요한 기여를 한 사례들이 존재합니다. 물론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이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도 일본인, 여진인, 몽골인 등 수많은 이방인들이 조선의 땅에 발을 딛고 조선인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닫힌 사회로만 알려진 조선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오늘날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선사합니다. 1. 조선의 문을 두드린 이방인들: 귀화의 배경과 동기조선 시대 외국인 귀화는 단순히 개..
전남 완도 ‘청해진’ – 장보고 이후에도 살아 숨 쉰 국제 무역항 전남 완도 ‘청해진’ – 장보고 이후에도 살아 숨 쉰 국제 무역항오늘날의 전라남도 완도는 푸른 바다와 섬이 어우러진 남해안의 보석 같은 지역입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청해진(靑海鎭)**은 단순한 유적지를 넘어, 동아시아 국제 해상무역의 중심지이자 신라인의 자부심이 담긴 역사 공간입니다.특히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9세기 장보고(張保皐) 장군이 해상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장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장보고의 삶과 활동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사실 장보고 사후에도 청해진은 한동안 국제적 항구 기능을 지속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뒷이야기를 되짚어보려 합니다. 📌 장보고의 청해진, 해상 네트워크의 시작828년, 장보고는 신라의 허가를 받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합니다. 그는 이..
울릉도와 독도,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우리 땅’의 증거들 울릉도와 독도,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우리 땅’의 증거들동해의 외딴 섬, 독도(獨島). 매년 외교적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독도가 과연 누구의 땅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합니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의 고유 영토입니다.특히 삼국시대부터 이어지는 문헌과 고고학적 기록은 독도가 단순한 바위섬이 아닌,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고, 관리해 온 실질적 영토였음을 명확히 증명합니다. 📌 고대 삼국시대, ‘우산국’의 존재독도와 울릉도는 삼국시대 당시 **우산국(于山國)**이라는 독립된 정치체로 존재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지증왕 13년(512),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시키다.”이는 신라가 우산국을 정복..
발해, 고구려를 넘어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외교 유산 발해, 고구려를 넘어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외교 유산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발해가 고구려의 정신과 문화를 계승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발해는 단순히 고구려의 후예를 넘어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독자적인 외교력을 발휘하며 강대국으로 우뚝 섰던 '해동성국(海東盛國)'이었습니다. 당나라, 일본, 흑수말갈 등 주변국들과 활발한 외교 관계를 맺으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이끌었던 발해의 외교 유산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1. 고구려 계승을 넘어선 독자적인 정체성 확립: 발해의 건국과 초기 외교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연합하여 건국한 나라입니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고구려 ..
한양 도성 밖 ‘성저십리’ – 조선 서민들의 삶이 숨 쉬던 공간 한양 도성 밖 '성저십리': 조선 서민들의 삶이 숨 쉬던 공간조선 시대 수도 한양은 '도성(都城)'이라 불리는 성곽 안에 정치, 권력, 문화의 중심지가 집중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의 일상이 모두 도성 안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성 바깥, 즉 성 밖 10리(약 4km) 이내 지역인 '성저십리(城底十里)'는 조선 백성들의 삶이 역동적으로 펼쳐진 또 하나의 한양이었습니다. 성저십리란 무엇인가?'성저십리'는 말 그대로 도성 아래(성저), 10리 거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한 거리 개념을 넘어서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공간적·사회적 계층 구획의 경계였습니다. 도성 안이 왕실, 양반, 중인들의 거주지였다면, 성저십리는 상인, 수공업자, 천민, 농민이 집중된 도시 외곽 생활권이었습니다.성저십..
경남 산청 '황매산' — 동학농민운동의 또 다른 격전지 경남 산청 '황매산': 동학농민운동의 또 다른 격전지철쭉과 억새로 유명한 아름다운 산, 황매산(黃梅山)이 19세기 말 동학농민운동의 중요한 격전지였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이 평화로운 산은 당시 피의 전장이었으며, 산청 황매산 일대는 동학군이 조직적인 저항을 펼쳤던 숨은 거점이었습니다.1. 동학농민운동의 확산, 그리고 산청1894년 전봉준이 주도한 고부봉기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를 넘어 경상남도 일대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산청은 경남 북부의 교통 요지이자 동학의 교리와 조직이 이미 깊이 퍼져 있던 곳으로, 동학군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습니다.2. 황매산 전투: 민중의 저항이 깃든 땅1894년 가을, 진주성에서 밀려난 동학군 수백 명이 황매산에 재집결하여 일본군 및 관군과 접전을 벌였습니다. 험준한..
고려 대몽항쟁의 마지막 보루, 강화도 온수리 – 민초들의 피와 의지로 지켜낸 땅 고려 대몽항쟁의 마지막 보루, 강화도 온수리: 민초들의 피와 의지로 지켜낸 땅13세기, 고려는 몽골의 침략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에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는 결단을 내렸고, 그 중심에 **온수리(溫水里)**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온수리는 단순한 행정 구역이 아닌, 고려왕실의 피난처이자 최후의 항전 기지였으며, 수많은 민초들의 피와 땀이 깃든 공간이었습니다.1. 강화도 천도와 온수리의 등장1232년, 고려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했습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강화도는 몽골 기병이 접근하기 어려운 천연 요새였으며, 이는 지형적 이점을 활용한 장기전 전략이었습니다.온수리는 강화도 내에서도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왕실의 거처와 관료 조직이 자리 잡으면서..
한글 이전,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썼을까? – 이두와 향찰의 문자 생활 한글 이전,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썼을까?: 이두와 향찰의 문자 생활1443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이전,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했을까요? 공식 문자인 한자 외에,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는 **이두(吏讀)**와 **향찰(鄕札)**이라는 독특한 문자 체계가 존재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글이 없던 시절 **조선의 문자 생활**을 조명하며, **이두와 향찰의 탄생 배경, 사용 방식, 사회적 의미**를 살펴봅니다.1. 이두(吏讀)란 무엇인가?: 관청의 공식 한자 변형 표기법**이두(吏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조선어(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 체계입니다. 주로 **관청 문서, 행정 기록, 법령 전달** 등에 사용되었으며, 말단 관리나 지방 관청의 하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