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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

흥선대원군, 쇄국정책만 고집했을까? 외면당한 근대화의 꿈

흥선대원군, 쇄국정책만 고집했을까? 외면당한 근대화의 꿈

들어가며: 오해와 진실 사이, 흥선대원군의 딜레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채응(李昰應)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서양 세력의 침략에 맞서 나라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던 인물.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으면서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서양과의 교류를 철저히 거부했던 고집스러운 수구파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흥선대원군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오로지 쇄국만을 고집했던 인물이었을까요? 그의 정책은 단순히 고집과 아집의 산물이었을까요? 놀랍게도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문물과 과학 기술에 대해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히려 근대화를 향한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기존의 오해를 벗고, 그가 처했던 시대적 딜레마와 함께 '쇄국정책' 뒤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서양 열강의 무력 침략

1. 쇄국정책 이전에 있었던 개방의 가능성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았던 19세기 중반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시아로 진출하며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들던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정세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서양 세력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서양의 과학 기술과 군사력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을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조선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흥선대원군 집권 초기, 그는 서양인들과의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특히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자 노력했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천주교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통해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맺고 서양의 기술과 정보를 얻으려 했습니다. 특히 러시아가 함경도로 남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남종삼(南鍾三)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이 제안은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흥선대원군이 외세를 외세로 막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구상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만약 이 시도가 성공했다면 조선은 서양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근대화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곧바로 좌절되었고, 흥선대원군은 개방에 대한 고민을 접게 됩니다.

2. 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나?

개방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흥선대원군이 결국 **'척화(斥和)'**를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복잡한 국내외 정세와 그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서양 열강의 무력 침략. 흥선대원군의 개방 시도가 좌절된 후, 서양 세력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 그리고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였고, 조선 백성들에게 엄청난 공포와 피해를 안겼습니다. 특히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儀軌)를 약탈해 간 사건은 흥선대원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서양 세력이 교역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려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 천주교 박해.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서양 세력의 침략을 위한 도구로 인식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교리는 조상의 제사를 부정하는 등 유교적 가치관과 충돌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유교적 질서를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서양 세력의 침략에 대한 강력한 명분을 제공하게 됩니다. 병인양요는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병인박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종교와 문물이 조선의 전통과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셋째, 내부적인 반발. 당시 조선의 집권 세력이었던 양반 사대부들은 성리학적 가치관을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사학(邪學)'이라며 강력하게 배척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서양과의 교류를 시도할 경우, 이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하던 흥선대원군에게도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은 부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내부적인 정치적 안정을 위해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하는 쇄국정책을 선택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3. 쇄국정책, 과연 실패한 정책이었을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오늘날 '시대착오적'이고 '실패한 정책'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근대화의 흐름에서 뒤처지게 되었고,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선택은 단순히 고집스러운 정책이 아니라 자주적인 근대화를 위한 고뇌의 결과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무력 침략에 굴복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는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고, 서원 철폐를 통해 양반 세력의 권력을 약화시켰으며,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개혁들은 모두 나라의 힘을 키워 외세의 침략에 맞서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서양의 힘에 기대어 근대화를 이루는 대신, 조선 스스로의 힘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비록 그 결과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그의 자주적 근대화에 대한 열망만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결론: 흥선대원군, 시대를 고민했던 정치가

흥선대원군은 결코 무조건적인 쇄국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개방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현실주의자였으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뇌했던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시도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복잡한 국내외 정세와 맞물려 결국 좌절되었고, 그는 나라의 문을 닫아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흥선대원군을 단순히 '쇄국정책'이라는 한 단어로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정책은 당시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고뇌와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것입니다. 흥선대원군, 그는 과연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였을까요, 아니면 역사의 흐름을 막아선 수구파였을까요? 정답은 없겠지만, 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또 다른 역사의 진실과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