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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

한글 이전,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썼을까? – 이두와 향찰의 문자 생활

한글 이전,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썼을까 이두와 향찰의 문자 생활
한글 이전,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썼을까 이두와 향찰의 문자 생활

한글 이전,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썼을까?: 이두와 향찰의 문자 생활

1443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이전,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했을까요? 공식 문자인 한자 외에,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는 **이두(吏讀)**와 **향찰(鄕札)**이라는 독특한 문자 체계가 존재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글이 없던 시절 **조선의 문자 생활**을 조명하며, **이두와 향찰의 탄생 배경, 사용 방식, 사회적 의미**를 살펴봅니다.


1. 이두(吏讀)란 무엇인가?: 관청의 공식 한자 변형 표기법

**이두(吏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조선어(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 체계입니다. 주로 **관청 문서, 행정 기록, 법령 전달** 등에 사용되었으며, 말단 관리나 지방 관청의 하급 실무자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두의 주요 특징

  • **한자어뿐만 아니라 고유어도 표기**: 한자에 문법적 요소(조사, 어미 등)를 추가하여 한국어를 표기했습니다.
  • **소리(음독)와 뜻(훈독) 혼용**: 한자의 소리와 뜻을 섞어 문장을 구성했습니다.

이두는 한자의 문법을 조선어에 맞춰 '조작'한 문자체계였기에, 한자 문맹이었던 일반 백성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2. 향찰(鄕札)이란 무엇인가?: 향가와 함께한 고유 표기법

**향찰(鄕札)**은 주로 **신라와 고려 시대의 노래인 향가(鄕歌)**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되던 표기 체계입니다. **고유어 표현과 시적 운율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형식**으로, 이두보다 문학적 활용이 중심이었습니다.

향찰의 주요 특징

  • **훈독(뜻으로 읽기)과 음독(소리로 읽기) 조합**: 순우리말(고유어)을 담을 수 있는 유연성이 있었습니다.
  • **문학 및 신앙 중심**: 향가 외에 불교 경전 번역, 민간 전승 기록, 무속 신앙 표현 등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아미타불" 같은 불교식 구절도 향찰로 표현하여 일반 백성들의 신앙적 이해를 도왔습니다.


3. 이두와 향찰은 누가 사용했나?

**이두**는 행정 실무 중심, **향찰**은 문학·신앙 중심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사용하는 계층도 달랐습니다. 다음은 주요 사용 계층을 요약한 표입니다.

문자 종류 주요 사용 계층 주요 사용 분야
이두 향리, 관리, 승려 행정 문서, 공문, 사찰 기록
향찰 시인, 승려, 무속인 향가, 불교 서사, 민간 종교 전승

이러한 한계는 **일반 백성, 여성, 아동**이 문자를 제대로 익히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고, 이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문자 생활의 급진적 변화를 불러온 배경이 되었습니다.


4. 한글 창제와의 연결점: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나?

**이두와 향찰**은 분명 고유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창의적인 노력이었지만, **일관성 없는 규칙**과 **해독의 어려움**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특히 일반 백성이 쉽게 익히고 쓰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자체계였던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백성도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문자"**라는 철학 아래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문자 혁신을 넘어, **지식의 평등화와 문화 민주화**를 이루는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결론: 한글은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훈민정음이 마치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뿌리에는 **이두와 향찰**이라는 독창적인 문자 실험의 역사가 존재합니다. 이두와 향찰은 수백 년 동안 한국어를 문자로 남기기 위한 고군분투의 결과물이었고, 그 한계와 가능성이 **한글 창제**를 부른 역사적 토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