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개성’은 지금의 ‘개성’이 아니다? — 수도 권역의 실제 범위 재해석
“고려의 수도 개성”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현재의 북한 개성시와 송악산 일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역사적 문맥에서의 ‘개성(당시 공식 명칭은 개경(開京))’은 단일 도시 경계보다 넓은 수도 권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왕궁이 있던 중심지와 그 외곽 방어선, 교통·상업 네트워크, 주변 행정 구역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수도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들어가며: 오늘의 ‘개성’ vs. 고려의 ‘개경’
현재의 개성시는 행정구역상 비교적 명확한 경계를 갖는 도시입니다. 반면 고려시대의 ‘개경’은 왕도(王都)와 수도권 방어 체계, 행정·경제 배후지를 포괄하는 더 넓은 공간 개념으로 쓰였습니다. 기록에서 등장하는 성곽·관문·역로(驛路)·창고·시장 등은 단순한 도시 설비가 아니라, 수도로서 개경이 유지되어야 할 국가 거점 인프라를 의미합니다. 이 글은 그 범위를 공간·기능·행정의 세 측면에서 정리해 오늘의 오해를 바로잡고자 합니다.
1) 공간적 범위: 성곽 체계와 외곽 방어선
개경은 송악산을 중심으로 한 중심 도시(왕궁·관청·시가)와 이를 둘러싼 다중의 방어·관리 장치로 구성되었습니다. 왕궁이 있던 만월대 일대와 주요 관청이 위치한 내핵부가 핵심 행정·의례 공간이었다면, 그 외곽에는 내성–중성–외성으로 이어지는 성곽 라인과 산성·관문이 분산 배치되어 수도를 방어했습니다. 이러한 입체형 성곽 체계는 전시에는 방어 거점, 평시에는 치안과 물자 통제의 기능을 수행하여 ‘도시=성곽 내부’라는 단순한 등식보다 훨씬 넓은 활동 범위를 창출했습니다.
또한 산지와 하천을 활용한 자연지형 방어는 성벽만큼 중요했습니다. 송악산·자락의 고지대에는 신호·초소가, 하천 교차부에는 교량·나루가 배치되어 감시–경보–차단 체계가 수도권 전역에 걸쳐 작동했습니다. 오늘날 행정구역상의 개성시 경계로는 이 네트워크의 실제 범위를 충분히 포착하기 어렵습니다.
2) 기능적 범위: 정치·경제·문화의 수도 권역
개경은 군사·행정의 중심일 뿐 아니라, 교통과 상업의 결절점이었습니다. 전국의 공물·상납품이 모이는 창고와 시전(市廛), 장시(場市), 역참이 연동되며 수도 물류망을 형성했습니다. 수도 인근의 농업 지대와 수공업 집적지는 왕실·관청·군의 수요를 뒷받침하는 배후 경제권으로 기능했고, 사찰·서원·학교 등의 교육·의례 시설은 문화·이념의 확산 거점이 되었습니다.
즉, 개경의 ‘도시성’은 궁성과 관청이 있는 좁은 도심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내륙로·해상로와 연결된 역로망, 주변 마을·읍성·창고·시장, 수도권 사찰·원(院) 등으로 이어지는 확장형 도시 생태계가 실제 수도의 작동 범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개성 도심 사진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보다 큰 생활·경제 동심원이 존재했던 셈입니다.
3) 행정적 범위: 명칭과 제도의 차이를 이해하기
문헌에서는 수도를 개경(開京)이라 표기하는 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후 시대에 들어 ‘개성’이라는 지명이 널리 쓰이면서, 현대의 우리에게는 ‘개성=수도’라는 인상이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개경은 국가의 수도 기능을 의미하는 행정·정치적 명칭의 성격이 강했고, 실제 운용에서는 왕도와 외곽 방어·행정시설, 배후 정착지까지 묶어 관리하는 체계가 동원되었습니다. 따라서 문헌에서의 ‘개경’ 혹은 ‘개성’ 언급은 도시 행정구역을 넘어선 수도 권역을 가리키는 맥락이 많습니다.
정리하면, 오늘날의 개성시는 ‘옛 수도의 핵심부’에 가깝고, 고려시대의 ‘개경(개성)’은 그 핵심부에 더해 외곽 성곽·관문·역로·배후 정착지까지 포함한 광의의 수도권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4) 자주 나오는 오해와 바로잡기
- 오해 ① “개성=송악산 주변 한정” — 송악산 일대는 왕성·핵심 행정 공간의 중심이었지만, 실제 수도 운영은 외성·관문·역로·창고·시장 등 광범위한 인프라를 전제로 했습니다.
- 오해 ② “성곽 안이 도시 전부” — 고려 수도는 다중 성곽과 자연지형, 교통망을 묶는 방어·물류 시스템으로 작동했습니다. 성곽선은 관리자·군사적 경계일 뿐 생활권·경제권은 그 밖으로 확장되었습니다.
- 오해 ③ “현행 개성시 경계=역사적 수도 범위” — 현대 행정구역은 기록 속 수도권 전체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문헌의 ‘개경/개성’은 기능적으로 더 넓은 권역을 지시합니다.
5) 무엇이 ‘넓은 개경’을 증명하는가
첫째, 성곽·관문·산성의 다층 배치는 수도를 한 점이 아니라 권역으로 설계했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역로와 역참의 밀도는 수도로 집중되는 공물·사행(使行)·사신 왕래의 규모를 설명하며, 이는 도심 외곽까지 관·군의 상주와 물자 흐름이 이어졌다는 뜻입니다. 셋째, 시장·창고·사찰 네트워크는 왕도 주변의 생산·소비·의례 기능이 분화·확장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된 결과, 고려의 ‘개경’은 오늘날 한 도시 경계로 환원하기 어려운 도시–권역 복합체로 작동했습니다.
6) 오늘의 시각: 왜 범위를 바로 이해해야 하는가
개경의 실제 범위를 넓게 보는 관점은 단순한 지명 해석을 넘어서, 국가 수도의 운영 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수도는 왕궁과 관청만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방어선, 물류, 상업, 의례, 교육, 배후 농업·수공업 등 전체 생태계가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따라서 “고려의 ‘개성’은 오늘의 ‘개성’과 다르다”는 말은 도시를 권역으로 이해하라는 학습의 촉구에 가깝습니다.
요약
- 고려의 수도 명칭은 주로 개경으로 표기되며, 현대의 ‘개성’과 개념·범위가 달랐습니다.
- 왕궁·관청의 중심부 + 다중 성곽·관문 + 역로·시장·창고 + 배후 정착지가 결합한 확장형 수도권이 실제 운영 단위였습니다.
- 그러므로 “고려의 개성=오늘의 개성시”라는 등식은 역사적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FAQ
Q1. 왜 ‘개경’과 ‘개성’이 혼용되나요?
시대에 따라 표기와 행정 호칭이 달라졌고, 후대 문헌·현대 서술에서 ‘개성’이 널리 쓰이면서 수도 개념과 지명이 겹쳐 사용되었습니다. 맥락상 수도 권역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Q2. 현재 개성시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현대의 개성시는 행정구역 경계가 고정된 도시입니다. 반면 고려의 개경은 방어선·물류·배후지까지 포괄하는 기능적 수도권으로 작동했습니다.
Q3. ‘넓은 개경’을 보여주는 핵심 단서는?
다중 성곽과 관문 체계, 촘촘한 역로·역참, 창고·시장·사찰 네트워크 등입니다. 이는 수도 체계가 외곽까지 확장되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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